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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정혜경 교수의 '전통 한식 문화']
고려 개경(개성), 회회인이 팔던 쌍화(만두, 찐빵)

등록일
03.23
조회수
250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찐빵 혹은 만두에도 개성 음식문화가 녹아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고려시대 가요인 <쌍화점>은 회회인 즉 이슬람인이 운영하는 음식주점이었고, 여기서 팔았던 쌍화는 지금의 만두나 찐빵이었고, 술은 증류주인 소주였을 것이다. 개성은 고려시대 500년간의 도읍지였다. 개성음식의 이해는 고려사회의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자, 이제 고려시대 개경의 음식문화를 살펴보자.



국제교류 음식도시, 고려 개경 

  고려시대 개경은 다양한 음식문화가 교류되는 변화무쌍한 국제도시의 면모를 지녔다. 고려 현종 2년(1010)에는 몽고, 송, 거란, 여진 일본 등 다른 나라에서 온 사절이나 상인이 머무는 객관으로 영빈관, 회선관을 최초로 개설하고 이를 기점으로 객관이 크게 늘어났다.

  고려시대 개성을 방문한 송나라 사신인 서긍이 기록한 <고려도경>(1123)에는 외국의 사신이나 부사가 객관에 오면 식사를 얼마나 호화롭게 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객관에 묵는 사신이나 부사에게 1일 3식에 5조俎를 차려 내었다고 하며, 이때 조는 모두 붉은 색을 칠했으며 그릇인 기명에는 황금을 발랐다고 하니 화려함이 극치에 달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타 사절에게도 상을 각각으로 하여 3식을 차렸고, 계급에 따라 상의 수는 감하기도 하였으며 하절下節에는 매 5인씩의 연상連床을 차렸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공설 주막이 처음으로 개설되었다. 이는 공식 술집의 효시라고도 볼만하다. 또 숙종 2년(1097에) 교역을 위하여 주전鑄錢이 사용되기 시작한 이래 돈의 사용과 유통을 장려하기 위하여 개성에는 좌우주점左右酒店을 개설하였다.  개경인들이 새로운 화폐인 주전을 잘 사용하지 않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차와 술, 음식 매매에는 반드시 이 철전을 쓰게 한 것이다. 나라가 술집 운영까지 관여한 셈이니 조정에서 신경 쓸 만큼 술집이 꽤나 융성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서민층에서도 술을 팔고 사는 풍습이 생겼고 주막에 모여 회음하는 풍습도 함께 발달하였다. 지방에 공설한 주식점酒食店 또한 주점의 역할도 하였다. 

  고려가요인 <쌍화점>은 바로 고려시대 주막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 고려 가요인 <쌍화점> 중에서 다음 구절을 살펴보자. 


1연) 쌍화점에 쌍화 사라 가고신댄

     회회回回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4연) 술 ᄑᆞᆯ 지븨에 술을 사라 가고신댄

     그 짓 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쌍화점은 쌍화를 파는 회회아비가 운영하는 술집으로 짐작된다. 여기에 나오는 ‘회회아비’는 외국인, 아마도 무슬림 위구르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고려가요가 창작될 당시 개경에는 외국인들이 제법 있었고 외국 문화와 교류가 활발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창작된 작품이 바로 ‘쌍화점’이다. 

  그렇다면 ‘쌍화점’에 담겨 있는 다문화적 요소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 노래는 전체 4연으로 이루어진 연장체 시가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이슬람과의 문화교류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제1연과 4연이라 할 수 있다. 제 1연에 등장하는 ‘쌍화’와 제 4연에 등장하는 음식인 ‘술’이 바로 그것이다. <쌍화점>이 창작된 고려 충렬왕 때에는 원나라를 비롯한 이슬람권 문화와 활발하게 교류가 이루어지던 시기이다.  ‘쌍화’ 와 ‘술’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지 알아보자.



‘쌍화雙花’란 무엇인가

  ‘쌍화점’의 주인이 ‘회회아비’라면, ‘쌍화’는 ‘회회아비’가 속했던 위구르족이 즐겨 먹던 음식이었을 것이다. 조선 초의 <훈몽자회>에서 ‘만두’를 ‘상화 만饅’ ‘상화 두頭’로 풀었다면, ‘쌍화’는 ‘만두’와 유사한 음식으로 볼 수 있다. 건국 초기부터 이슬람 상인들과 교역하기 시작한 고려는 원나라의 침략 이후 서역과의 교류가 증대된다. 이로 인해 서역의 음식문화는 고려 음식문화에 영향을 주게 된다. 

  밀가루로 만든 피에 소를 넣어 만드는 음식으로는 터키와 중앙아시아에서 주로 먹는 만티manti 외에 삼사samsa를 들 수 있다. 페르시아가 기원인 삼사는 일종의 군만두로 세모뿔 모양이다. <고려사>의 팔관회 기록에 등장하는 ‘쌍하雙下’는 식사 마지막에 왕에게만 바치는 귀한 음식이었다. 그러나 점차 고려에 정착한 서역인이 증가하면서 ‘쌍하’ 혹은 ‘쌍화’ 전문점이 생기고, 이 음식이 고려인에게도 익숙해졌다. 다만 밀가루가 귀했고 끓이거나 찌는 것에 익숙한 한국인의 식습관으로 인해, 기름에 튀기거나 구워야 하는 방식보다는 찌거나 삶는 형태의 만두가 친숙하게 자리잡았을 것으로 보인다. ‘개성편수’ 혹은 ‘변씨만두‘라 불리던 개성 지방의 만두는 일반적인 둥근 형태가 아닌 삼각뿔 형태라는 것은 바로 삼사의 영향으로도 볼 수 있다. 


<사진 1. 삼각뿔 형태의 만두>

<사진 1. 삼각뿔 형태의 만두>


  ‘상화병’은 오늘날 우리가 먹는 만두饅頭와 비슷한 종류의 음식이다. 고려시대에 이슬람 상인들에 의해 우리나라로 유입되어 현재는 만두의 한 종류로 인식된다. 유둣날에 먹는 우리의 전통 시절 음식의 하나인 쌍하 또한 고려시대에 이슬람 문화권으로부터 유입된 상화霜花라고도 할 수 있으니 흥미롭다. 한편, 쪄낸 모양새가 마치 서리가 내려앉은 것처럼 하얀색을 띠고 있어 ‘서리 상’자를 써서 상화霜花라고 하기도 한다는 견해도 있다. 더불어 고려시대에 서구 이슬람으로부터 유입된 음식이 개성 편수로 진화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개경 쌍화의 진화. 찐빵·만두·편수로 

  상화는 조선시대 문헌인 <음식디미방>과 <규합총서>에 그 제조법이 기록되어 있다. 1670년대에 나온 <음식디미방>에서는 밀가루에 술을 넣고 반죽하여 부풀린 다음 오이, 박, 버섯으로 속을 넣거나 또는 팥으로 속을 넣어 찐다고 하였다. 1809년에 나온 <규합총서>에는 팥소를 넣은 상화를 소개하였다. 이러한 상화가 고려 상화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그리고 고려시대 상화의 형태가 정확히 어떠한지는 알기 어렵다. 그렇지만 추측건대 오이나 박, 버섯으로 속을 넣은 상화는 오늘날의 만두로, 팥을 넣은 것은 찐빵의 형태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음식디미방>에 기록된 ‘상화법’은 그 내용이 길다. 그러나 이 긴 글을 차분히 읽어 내려가노라면 저자인 장계향 어르신에게 감동하게 된다. 그녀의 해박한 지식이 엿보임과 동시에 이 방법을 후손들에게 남기고자 하는 노력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조리과학을 전공한 입장에서 보아도 이 제조법은 과학적이고 정확하다. 나는 장계향을 ‘전통 조리 과학자’라고 생각한다. 긴 조리법이지만 한번 찬찬히 읽어보자.   


  잘 여문 밀을 보리 찧듯이 찧어 껍질을 벗겨내고 돌이 없도록 잘 씻은 다음 깨끗한 멍석에 널어 말리는데, 이 때 너무 바짝 마르지 않게 적당히 말린다. 두 번째 찧은 다음에는 굵은 체로 치고 키로 겉가루를 제거하며, 세 번째 찧을 때부터는 가루를 가는 체와 모시 베를 사용하여 곱게 쳐 둔다. 쌀 1줌에 물을 많이 부어 낱알이 보이지 않도록 끓인 다음 밀기울 3되만 그릇에 담고, 끓인 쌀죽을 부어 넣고 막대로 저어서 걸쭉한 콩죽같이 죽을 쑨 다음 헤쳐 두어 식힌다. 쌀죽 솥에 밀기울을 넣으면 빛이 누렇게 되므로 밀기울을 그릇에 담은 다음에 죽을 붓는 것이 좋다. 깨끗이 디딘 누룩을 칼로 깎아 5홉을 물에 담고 누런 물이 우러나면 물을 따라 버린 다음 이 가운데 1숟가락을 밀기울로 만든 죽에 섞어 넣는다. 서늘하지도 덥지도 않은 곳에 두었다가 다음 날 다시 밀기울로 죽을 쑤어 섞어 넣는다. 3일째 되는 날 새벽에 술을 걸러내어 맛이 쓰지 않고 순하게 하고, 가는 명주자루에 다시 걸러내어 먼저 만들어 놓은 고운 밀가루로 말랑말랑하게 반죽을 빚는다. 베에 가루를 뿌리고 반죽한 것을 두어 먼저 빚은 덩이가 부푸는 듯해지면 솥에 안쳐 찌면 된다. 상화에 넣는 소는 오이나 박을 화채 썰듯이 썰어 무르게 삶고 석이버섯이나 표고버섯, 참버섯을 가늘게 찢어 단 간장기름에 볶은 다음 잣과 후춧가루로 양념하여 만든다. 

  여름에 시간이 많지 않으면 껍질을 벗긴 팥을 쪄서 으깬 다음 꿀과 반죽하여 소로 사용한다. 붉은 팥을 죽 쑬 때처럼 쪄서 으깨고 숯불에 솥뚜껑을 놓은 다음 이것을 볶아 다 마르면 찧어서 체로 친 다음 꿀과 함께 눅게 섞어 넣으면 여러 날이 지나도 쉬지 않는다. 그러나 껍질 벗긴 팥을 쓰면 소가 그 이튿날이면 쉬게 된다. 찔 때는 시루의 테를 잘 감싸고, 밥보자기를 깐 다음 반죽들이 서로 닿지 않도록 잘 안친 다음, 시루에 맞는 그릇을 덮어 김이 새나가는 곳 없이 하고 수건으로 둘레를 둘러준다. 마른 장작으로 불을 급히 때어야 하는데, 이 때 장작이 다 타면 거두어 내고 다시 때운 후에 꺼내면 알맞게 잘 익는다. 불이 약하면 상화가 끈끈하고, 너무 오래 찌게 되면 색깔이 누렇게 된다.


  다음은 1600년대 말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주방문酒方文>에 기록된 상화에 대한 내용이다. 이 책은 아예 제목부터 ‘술 만드는 방법’이라 하여 술 만드는 법을 담았음을 드러내었다. <주방문>은 술 이외에도 음식 조리와 가공법을 소개한 조리서인데 상화를 만들 때에 콩가루를 꿀에 재워 소로 쓰거나 채소로 만들라고 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곰팡이가 피거든 밀가루를 깨끗이 하라고 하였다. 이는 발효가 되거든 만들라는 의미이다. 누룩을 넣어 발효시킨 다음에 상화를 빚었다는 의미이다.  


  백미로 죽을 쑤어 식거든 누룩의 겉껍질을 벗기고 배만큼 만들어 물에 담갔다가 붉은 물은 우려서 버리고 새 물에 담가 세게 주물러, 뿌연 물을 받아서 그 죽의 된 정도를 고자묵만 하게 섞어 끓여 따뜻한 데 두어라. 이틀 만에 또 백미로 죽을 쑤되, 밑술을 2되를 하였거든 5홉을 쑤어 덜어라. 이튿날 곰팡이가 피거든 밀가루를 깨끗이 하여 그 술에 소금을 간간이 하여 맞게 말아 빚어 놓아두었다가 곰팡이가 피거든 시루에 증편 찌듯이 하라. 소는 정함이나 콩가루에 꿀을 말거나 하라. 채소도 좋다. 반죽을 부드럽게 하여야 연하여 좋다.


  다음은 빙허각 이씨가 지은 <규합총서>의 “상화‘이다. 만두라고 하지 않고 상화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누룩을 이용하여 발효 시킨 상화를 만들고 있다. 


  밀가루를 깁체(명주 체)에 곱게 친다. 삭임을 만들려면 밀기울로 죽을 쑤어 가루 누룩 2줌을 버무려 전날 저녁에 넣었다가 이튼날 아침에 거른다. 이렇게 만든 삭임을 가루에 반씩 섞어 그릇에 담아 더운 곳에 놓고 두껍게 덮고 바람을 들이지 않는다. 이렇게 반나절이 지나면 부풀어 많아지고 벌의 집같거든 양념한 껍질을 벗긴 팥 꿀소를 넣되 위는 두껍게 덮고 밑은 얇게 빚는다. 백지를 더운 방에 펴 놓고 빚은 것을 놓고 바람을 쏘이지 않으면 부풀어 몸이 반반해 질 것이다. 시루에 보자기를 펴고 상화를 냉수에 담가 뜨는 것을 차례로 안쳐 큰 시루에 찌고, 익거든 물을 뿌려 낸다. 삭임을 갑자기 만들기 어렵거든 막걸리도 쓴다.



쌍화점에 등장하는 술, 소주

  <쌍화점>은 제1연부터 4연까지 동일한 구조가 반복되는 특성을 지닌다. 그럼, 제4연에 등장하는 ‘술’ 은 어떤 술일까? 이 술은 우리 고유한 전통주이기보다는 외래주일 가능성이 높으며, 외래주로서 다문화를 의미하는 술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증류주인 소주의 형태일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즐기는 증류주인 소주는 페르시아, 이슬람에서 몽골인 원으로 전해진 후 다시 고려에 ‘아락주’로 전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술을 만들어 파는 술집 아비 역시 이슬람 출신으로 고려에 상주하며 장사를 했던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근거는 <고려사> 충혜왕 5년의 기록을 보면 고려 충렬왕 때에 이슬람 상인들이 가게를 빌려서 장사를 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당시 대부분의 집에서 일반 과실주나 곡물로 담근 술은 손수 빚어 먹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굳이 술을 사러 술집에 가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때는 증류주가 전래된지 오래 되지 않은 시기이므로 고려인들은 직접 증류 작업을 통해 술을 만들기보다는 증류 기술을 확보하고 있던 이슬람사람들이 제조하여 술집에서 판매하던 술을 구입했을 개연성이 높다. 


<사진 2. 고려시대의 찐빵 모습>

<사진 2. 고려시대의 찐빵 모습>



다문화사회, 개경의 다양한 음식문화

  고려시대 개경에는 이슬람인을 비롯한 외국인이 거주하였다. 이슬람인인 회회인은 쌍화점이라는 술집까지 열었다. 그리고 이곳 쌍화점에서 팔았던 음식이 바로 쌍화로 이후의 조선시대 조리서에 상화로 등장한다. 누룩과 밀과 팥소를 이용해 지금의 찐빵 혹은 만두에 가장 근접한 형태로 생각된다. 그리고 원나라로부터 들어온 증류주인 소주를 함께 팔았을 것이다. 이렇게 개성은 이미 고려시대에 외국인들이 들어와 음식점을 했을 전도로 국제교류가 활발한 다문화사회였다. 이러한 국제교류는 이후 개성의 음식문화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으며, 이후 개성의 음식문화를 다양하고 풍요롭게 하는 데 작용하였다.





정혜경 교수  - 호서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 ‘채소의 인문학’ 저자  - 한국식생활문화학회 회장과 대한가정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농림축산식품부의 식품산업진흥 심의위원과 한식 자문위원으로 있으면서 우리 음식 알리기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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